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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왕국

재미로 읽는 단편 수필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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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단편 수필 2

SunLight :D 2016. 12. 17. 00:29

잊을 수 없는 내 친구 - 김기원


나에게는 7월이 되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무더운 여름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크고 뚱뚱한 여자 아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을 시작하기 얼마 전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곳에서 한 여자 아이가 전학을 왔다. 이름은 김말순, 큰 체구와 까만 피부, 큰 코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입, 옆으로 쭉 째진 눈을 가진 아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선생님과 함께 겨실에 들어온 것이다. 아이들은 일제히 그 아이를 쳐다보았고 키득키득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출렁거리는 그 아이의 뱃살과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기침 소리와 함께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말순이는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할 친구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합시다!"

선생님의 말씀에 이어 말순이도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다. 큰 체구에 비해 목소리는 작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지며 자꾸 고개를 숙였다.

"말순이는 키가 크니깐 맨 뒷줄에 앉아야겠구나."

라고 선생님께써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옆 자리가 비어 있었고 맨 뒷줄이었으니까 말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그 아이와 나는 짝이 되었다.

 무더운 날씨도 짜증스러운데 큰 몸집으로 다가오는 말순이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순이는 작은 소리로

 "안녕, 반갑다."

라며 더운 입김을 훅, 하고 내뿜었다. 머릿속이 캄캄해져옴을 느꼈다.

어수선한 하루를 보내고 하교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말순이가 같이 집에 가자고 했지만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다른 친구들과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친구들은 재밌게 생긴 아이가 전학을 왔다며 히히덱거리고 운이 없게도 짝지가 된 내가 불쌍하다며 위로를 해주는 것이었다.

 다음 날 말순이에게 사건이 벌어졌다. 남자 아이들이 놀림감의 표적이 된 것이다. 이름으로 놀리기, 얼굴 생김새로 놀리기,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리기 등 남자 아이들은 쉬는 시간, 공부 시간 할 것 없이 말순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순이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자기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이들도 제풀에 꺾여 흥미를 잃어갔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여름방학이 코앞에 다가왔다.

 말순이도 이곳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고 아이들도 더 이상 특별한 취급을 하거나 심하게 괴롭히는 일은 없어졌다. 나 또한 말순이를 많은 친구들 중 한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내가 말순이를 특별한 친구로 여기게 된 일은 방학을 하고도 며칠 지나고 나서이다. 학원을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집에 빨리 가려면 으슥한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급한 마음에 으슥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때마침 엄마 심부름 나왔다는 말순이와 만났다. 으슥한 골목의 길동무라 말순이가 아주 반가웠다.

그렇게 둘이서 걸어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서워져서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 느낌은 진짜였고 따라오는 사람은 셋이였다. 다른동네에 사는 고등학생으로 불량배라고 소문이 나있는 오빠들이었다. 무서웠다. 저번에 어떤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본 적도 있고 도망친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세 명이나 따라 오는 데다 말순이는 달리기가 너무 느렸다. 나 혼자 도망쳐도 힘든데 말순이가 달리는 속도는 자꾸만 느려졌다. 말순이는 갑자기

 "안 되겠다! 기원아! 이리와!"

 하고 소리치더니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불량배들이 거의 가깝게 다가오는데 말순이는 멈추어선 것이다. 나는 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그런데 말순이가 그 집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면서 마구 소리쳤다.

 "엄마! 문 열어 줘! 아빠! 누가 따라와! 빨리 문 열어줘!"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달려오던 불량배들은 멈칫거리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완전히 달아나지는 않는 것이었다.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말순이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집에서 낯선 아줌마가 나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말순이는 그 아줌마를 껴안으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엄마! 저기 저 오빠들이 막 따라와! 경찰 불러!"

 그러자 그 아줌마는 나와 말순이를 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야? 여보! 경찰에 신고해요!"

 머뭇머뭇하던 불량배들은 아줌마의 말에 겁을 먹었는지 달아나 버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말순이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아줌마께서 눈치 있게 도와주셔서 불량배들을 쫓아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막 울면서 아줌마께 감사드렸다. 아줌마께서는 괜찮다 하시며 큰길까지 바래다 주시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으셨다.

 위험한 순간을 같이 넘긴 말순이와 나는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말순이와 같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생각이 깊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이 있을수록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친구가 말순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껏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말순이는 5학년이 되기 전 겨울방학 때 또다시 전학을 갔다. 몇 년간은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불량배 사건 외에도 여러 가지 잊지 못할 추억들도 많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고이 접어둔 추억들을 펼쳐볼 때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떠오른다.

 잊지 못할 나의 친구 말순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할 때 우리는 같이 있는 거라고 약속한 우리들만의 비밀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 말순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순수한 웃음으로 인사해야지.

 "인녕, 반가워!"


다음에는 더 재밌는 이야기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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