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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왕국

재미로 읽는 단편수필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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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단편수필 3

SunLight :D 2016. 12. 18. 00:25

'나 홀로 여행'은 나 자신과의 여행 - 한비야


"왜 오지로만 여행을 다니나요?"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없이 받는 질문이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배낭을 꾸리게 한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게 하는 이 원동력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여행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이번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인생의 안정기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왜 이런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나요?"

"인생의 전반부를 돌아보고 후반부의 계획을 잘 세우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것이 내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조금씩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떠나서 지금까지 그 짧지 않은 동안 기대했던 것만큼 성숙한 인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인간 성숙에 필요한 몇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을 얻은 건 확실하다.

우선은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수많은 어려움과 특이한 상황을 겪어 내면서 이제는 어떤 일이 닥쳐도 어렵긴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졌다.

또 하나는 세상을 판단하는 나의 잣대가 유연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가진 잣대가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듯이 사람들마다 생각과 가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가치 기준과 판단 기준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객관화되고 논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사람은 참 다르더라. 그런데 사람은 다 똑같더라."라는 것이다. 생활과 풍습이 다르고, 인종과 종교는 다르지만 결국 그 옷들을 다 벗어 놓으면 남는 건 인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서 케냐 마사이족의 아이들도 우리 아이고, 이집트 민박집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이고, 투르크메니스탄의 무채 파는 할머니도 우리 할머니라는 지구촌 한가족 개념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 되었다고 할까.

 홀로 떠나는 여행. 이것은 나 자신과의 여행이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니까.

여행 중에는 참 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 사건마다에서 얻은 경험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만들어 간다. 멕시코에서 두 달간 장맛비를 맞고 다니다 보면 서너 시간쯤 비를 맞는 것 아무것도 아니다. 네팔의 20박 21일 등산을 하고 나면 하루 14시간 산행은 차라리 휴식이다. 7박 8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나면 서울 부산 간 기차 여행은 눈깜빡할 사이다. 인도 슬럼가에서 납치당할 뻔했던 사람에게는 서울 밤거리는 안방처럼 편안하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간을 키우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한계의 지평선을 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1년은 평범한 인생 10년이다.

인도 슬럼가 이야기가 나와서 얘긴데, 인도 도시 여행의 안전수칙 1조 1항은 "해가 지면 돌아다니지 말라."다. 나는 어리석게 이 대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가 큰 위험을 맞았다. 장소는 캘커타, 내 숙소는 중심가였는데 원래 길눈이 어두운 내가 밤늦도록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싸구려 택시릭샤를 탔다. 분명히 숙소 근처였으니 릭샤로 가면 10분 이내일 것 같은데 앞자리에 친구 하나를 동승시킨 릭샤꾼은 30분 정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니 신시가지를 벗어나 컴컴한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로 가는 거요?"

"일방 통행이라 돌아가야 빠릅니다."

릭샤꾼, 느끼한 목소리로 대답. 아무래도 수상하다. 이 녀석 큰길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내 전대에는 현금이며, 여권, 여행자 수표까지 전 재산이 들어 있었다.

"빨리 가지 않아도 좋으니 큰길로만 가요."

소리를 뺵 지르니 앞에 탄 두 놈이 히쭉 웃는다. 아이고,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이런 떄일수록 내가 겁을 내고 있다는 걸 상대방이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야아, 말 안 들려? 당장 큰길로 나가."

 목청을 다해 소리를 지르자 찔끔했는지 큰길로 나갔다. 그러나 다시 부르릉부르릉 방향을 틀어 그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옆에 탔던 놈이 훌쩍 뛰어내리며 골목 안에 대고 자기 패거리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만 있다간 크게 봉변당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나 운전하는 놈의 팔을 비틀어 골목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안고 있던 배낭으로 힘껏 등짝을 후려치고는 큰길 쪽으로 뛰어내려 달렸다.

 늦은 시간이라 큰길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뒤에서 부릉부릉 그놈들의 릭샤 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틀림없이 납치당하는구나.'

미친 듯이 대로 중간으로 뛰어들어 도와 달라, 살려 달라, 고래고래 악을 썼다. 정말 다행히 정식 택시가 나타났다. 총알같이 뛰어올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숙소까지 돌아왔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청심환 한 알을 먹고 겨우 진정시켜 자고 나서 지배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제 그 장소 지형을 대충 설명했더니 얼굴이 파래진다.

 "아이고, 손님. 큰일날 뻔했네요. 거기가 캘커타 문둥이촌이에요. 하루에도 그 골목에서 몇 사람씩 죽어 나가요."


 이처럼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쿵쿵 뛰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그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숫가 산 뻬드로 마을의 식구들.

이 집의 가장 레히니는 조그만 가구 가게를 하는데 워낙 가난한 마을이라 일거리가 거의 없다. 그러니 가난할 수밖에. 그래도 아내와 딸 둘, 아들 둘과 언제나 즐겁게 웃으며 살고 있다.

 그 마을로 가는 배에 같이 타 사과 한 개를 권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다. 물론 돈을 받지 않는 민박. 세계 어느나라를 가든지 시골로 갈수록, 가난할수록 나그네를 온갖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서도 결코 돈은 받지 않는다. 적당히 계산해 돈을 주려고하면 성을 내면서 한사코 거절한다. 결국 가족들 눈에 안 보이는 곳, 그러나 쉽게 찾아낼 곳에 몰래 돈을 놓고 나와야 한다.

 산 중턱에 있는집. 아줌마는 내가 들어서자 영문도 모르고 반가워 한다. 그 뒤 한나절도 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차례로 이 신기한 한국 여자 구경을 와서 얼굴을 익혔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깡촌 사람들이 모두 한국을 알고 있다는 거다. 한국 축구팀이  1994년 월드컵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남미의 축구 열기는 대단해서 이 오지에서도 월드컵 출전국은 물론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 몇 대 몇으로 이기고 진 것까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레히니네 집은 너무나 가난해 과일이나 고기는 구경도 못하고 삼시세 끼 '또르띠야'라는 옥수수 빵과 으깬 팥, 커피가 전부, 이 집에서 키우는 닭들은 하루에 달걀 두 개를 낳는데 그걸 이틀간 모았다가 부쳐서 온 식구가 나눠 먹는 게 유일한 특식이다. 왕복 10시간 걸리는 화산에 등산 가는 날 아침, 내 등산화 옆에 삶은 달걀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줌마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장날을 기다렸다가 열다섯 살짜리 이 집 딸과 함께 장에 가서 볶음밥 재료를 잔뜩 사와 동네 잔치를 했다. 그 후 나는 일약 동네 유지가 되었다. 어린 꼬마들이 어떻게나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지 이 집 엄마 까르멘이 '비야꼬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오늘은 비야꼬리가 하나 어디 갔나?"

내가 자기 집에서 산다고 몹시 뻐기고 다니는 다섯 살짜리 이 집 아들 뻬드로는 내가 언제 가느냐고 매일 물으며 무조건 다음 주 일요일에 가란다. 이 녀석에게 다음 주 일요일이란 실제는 오지 않는 먼 미래. 

 떠나기 전날 레히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딸들은 적어도 고등학교까지, 아들은 대학교까지 보내고 싶단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돈을 벌어 저금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거다.

 "학비가 너무 비싸요. 대학 1년 수업료가 우리 2년 수입이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아저씨. 나도 돕겠어요."

 "무슨 말씀이오?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시오."

 그는 펄쩍 뛴다. 아들이 아직 어리니 앞으로 10년동안 열심히 벌면 될 거라고 한다. 그가 그 돈을 모으자면 10년간 하나도 안 쓰고 안 먹어야 한다. 내가 회사에서 받던 보너스 한 번으로 그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데.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다녔어요. 그 분은 지금 내 도움이 전혀 필요 없으니 아저씨를 통해서 그 은혜를 갚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지금 당장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이들을 꼭 도울 생각이다.


이번에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등을 다니면서도 수많은 일을 겪었다. 낸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일, 탄자니아 맘바 마을에서 나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었던 로즈 엄마 집에서의 민박, 난민촌 아이들의 잘려 나간 팔다리를 보며 가슴 아팠던 일, 그리고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이란에서의 로맨스 등. 

 여행은 농축된 인생이라고 하던가. 이 책을 쓰느라 지난 1년 반을 돌이켜 보니 마치 16년을 산 듯한 느낌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 기간 동안 내가 겪고 느낀 것을 땀 냄새 고스란히 담아 글로 옮기면서 나는 내내 즐거웠다. 어릴 때부터의 꿈을 이루고 있다는 벅찬 행복감이 감슴에 충만해서였다.

 사실 현재 나는 집도 절도 없다. 직장도 없고 수중에 있는 돈은 앞으로 1년간 중국 여행을 마치고 나면 한 푼도 남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나는 안정기에 들어서야 할 나이에 오히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벌써 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여행을 통해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을 얼마나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지구를 몇 바퀴 더 돌아야 만족할 만큼 얻을지도 몰르겠다. 아니, 영원히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편안한 삶을 포기한 대가와 단신 오지 여행이라는 달콤하지만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라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은 바로 나라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게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바다가 고요할 때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나 나는 내 배의 키를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은 깊은 행복감을 내내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다음번에는 더 재밌는 단편소설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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